앤소니 심 감독과 함께한
‘라이스보이 슬립스’
이민, 정체성, 그리고 필름으로 찍은 이유
2026년 5월 23일, 까사씨네마 프라이빗 GV에 앤소니 심 감독이 참석했다. 밴쿠버 한인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16mm 필름으로 담은 영화 ‘라이스보이 슬립스’를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부터 정체성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까지 약 48분간 이어진 대화를 정리했다.

© Casa Cinema — 2026.05.23 프라이빗 GV
01 — 왜 필름인가
앤소니 심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기 전부터 이 영화가 필름으로 찍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화면 비율도 시나리오에 직접 명시했을 만큼, 그에게 필름은 단순한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이야기의 일부였다.
“나는 더 이상 디지털로 찍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먹었어요. 이 영화는 90년대 배경이고, 필름이라는 느낌이 확실히 다르거든요. 스토리에 맞는 건 필름을 찍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해요.”
그는 16mm 필름 특유의 질감이 살아있는 이유로 카메라, 렌즈, 필름 스톡의 조합을 꼽으며, “카메라 팀과 미술팀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이런 느낌을 잘 살릴 수 있었다”고 촬영 스태프에 대한 신뢰를 강조했다.
02 — 감독이 직접 출연한 이유
영화 속 사이먼 역을 감독이 직접 맡은 것은 처음부터 의도한 일이 아니었다. 원래 인도인 캐릭터로 설계했으나, 촬영을 앞두고 캐스팅이 여의치 않았다. 밴쿠버의 한국 배우 풀이 워낙 좁았고, 해외에서 배우를 불러오면 예산이 감당이 안 됐다.
“캐스팅 감독들이 ‘우리는 이 배우, 이 배우, 이 배우인데 마음에 드냐? 싫으면 더 이상 볼 사람이 없다. 네가 해야 된다’고 했어요. 결국 할 수 없이 하긴 했는데, 역할이 내 성격이랑 많이 다르지도 않았고, 제일 편하게 연기한 역할이었어요.”
주연 배우와 결혼하게 된 사실에 대해선 “굉장히 안 좋아 보이니까 실제로 촬영장에서 배우를 꼬시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 않냐”며 웃음 섞인 답변으로 넘어갔다.
03 — 한국어와 영어 사이: 언어의 층위
영화에서 인물들이 한국어와 영어를 자연스럽게 섞어 쓰는 방식에 대해 진행자가 질문했다. 앤소니 심 감독은 이것이 치밀한 설계보다는 자신이 실제로 살아온 방식 그 자체였다고 답했다.
“대사를 쓸 때도 그냥 내가 이런 대화를 하면 어떻게 말할까 생각하며 썼어요. 주변에 이민 동기 친구들이 너무 많고,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말하는 게 너무 익숙하거든요. 누가 ‘이민자들이 이렇게 말 안 한다’고 할 수도 없잖아요.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실제로 동현 역의 배우가 캐나다 태생이라 한국어가 예상보다 서툴었고, 감독은 오히려 그 배우에게 “편한 대로 바꿔라”고 했다. 자연스러움을 우선으로 했기 때문이다.
04 — 소수자의 이야기, 타인을 향한 편지
관객의 질문 중 하나는 영화가 이민자, 여성, 노동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담으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향한 연서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이 영화의 시작은 불만이었어요. 한국 이민자 배우로서 역할이 너무 없고, 있어봐야 중국·일본 캐릭터뿐이었죠. 친구가 ‘그만 불평하고 네가 만들어라’고 했고, 맞는 말이다 싶었어요. 내가 밴쿠버 한국 이민자의 삶을 가장 잘 아니까, 그 이야기를 화면에 담으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는 ‘미나리’보다 먼저 이 아이디어를 구상했지만, 예산 문제로 기다리다가 선댄스에서 미나리가 상을 휩쓸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때는 이 영화를 볼 수도 없었어요. 아는 친구한테 내 시나리오 읽어보고 얼마나 겹치는지 확인해 달라고 했죠”라고 회상했다.
05 — 제목의 탄생: 라이스보이 슬립스
시나리오를 쓸 때 앤소니 심 감독은 특정 음악 앨범을 플레이리스트로 삼아 그 음악을 들을 때만 작업했다. 바로 ‘Riceboy Sleeps’라는 앤비언트 앨범이었다.
“글이 너무 안 써져서 ‘제목을 먼저 정하면 쉬워진다’는 책을 반신반의하며 따라해 봤는데, 그냥 지금 듣고 있는 앨범 이름을 붙여봤어요. 쓰면서 자연스럽게 제목과 이야기가 연결됐고, 결국 그게 최종 제목이 됐죠.”
‘라이스보이’는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받는 놀림말이지만, 성장한 후에는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으로 전환된다. “슬립스”는 그 정체성이 억눌린 채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감독은 “이 아티스트가 영화 잘 됐다고 연락해 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안 왔다”며 웃었다.
06 — 이 영화, 코로나의 산물
2020년, 코로나로 캐나다에서 집 바깥에 나갈 수 없던 시절. 앤소니 심 감독은 직업을 그만두고, 연기를 그만두고, 가구까지 팔고 멕시코에서 혼자 글을 쓰려고 했지만 코로나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십 몇 년 동안 이 일을 했는데 성공을 못하면 내가 실력이 없는 건가, 이게 마지막이라고 마음먹었어요. 코로나 때 동생 부부 집에 얹혀살면서 ‘이거 안 되면 그냥 보통 직업을 하자’ 하고서 만든 영화인데, 이 영화가 내 인생을 너무 많이 바꿔줬어요.”
그는 “이 영화가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것”이라며, 영화를 통해 얻은 모든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07 — 관객과의 공명: 나만 혼자가 아니었다
이날 GV에는 중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온 가족이 귀국한 경험이 있는 관객이 “너무 많이 울었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독은 이 반응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이 있어요. ‘나만 이런 감정을 느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라고요. 그래서 운다고 하더라고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나는 혼자라는 외로움을 느끼잖아요.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커넥션이 생길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08 — 캐나다 출신이 바라본 한국
현재 한국에 거주한 지 4년이 된 감독에게 “한국에 대해 좋은 것 하나, 싫은 것 하나”를 말해달라는 질문이 나왔다.
“퇴근 시간 서울 버스들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어떻게 매일 이 많은 사람들이 안 죽고 다니지? 이렇게 잘 돌아가는 도시가 없어요. 너무 기적 같아요. (웃음) 반면에 이렇게 빠른 변화가 가능했던 건, 한 세대 안에 전쟁 이후부터 AI 시대까지 모든 걸 겪었기 때문인데, 그 속도가 만들어낸 세대 간 간극이나 사회적 갈등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해요.”
EDITOR'S NOTE
앤소니 심 감독의 말 중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알고서 만들었으면 더 잘했을지 못했을지 모르겠다”는 겸손이었다. 사람들이 왜 우는지, 왜 공명하는지를 먼저 계산하지 않고 그냥 자신이 아는 것을 담은 것. 그것이 이 영화를 이 영화이게 만든 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