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름밤의 기억도, 이별하고 나면 꿈에서나 다시 만나겠지
윤단비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 '남매의 여름밤'에 대하여
생각보다 이별에 둔감하게 사는 우리를 위해 영화는 삶이 얼마나 많은 이별들과 함께 흐르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별의 아픔과 소중함을 아는 사람만이, 새로운 만남과 이어지고 있는 삶의 가치를 절실히 느낄 수 있기에 영화는 결코 슬픔이나 그리움 같은 감정에서 멈추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가 없었다면 그저 흘러가고 말았을 시간들의 소중함, '남매의 여름밤'은 그런 기억을 다시 소환하여 감각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더없이 소중했던 순간들을 제대로 추억하게 만드는 영화다.
© 윤단비 감독, 2020
10여년 전 막내고모의 장례식장에 갔었다. 성인이었지만,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간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난 아직 철없는 녀석이었고 하던 일이 바쁘던 시기라 피곤에 절어있었다. 그리고 그걸 핑계로 둘째 날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다음 날 발인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그 때의 심경은, 피로로 인한 귀찮음이나 예상했던 일에 대한 무덤덤함이었던 것 같다.
고모는 이미 몇 달 전부터 병세가 악화되었고 내원 치료도 받지 않아 마지막으로 얼굴을 뵈었을 땐 내가 알던 고모가 맞나 싶을 정도셨다. 모두 내색하진 않아도 '얼마 남지 않았다'라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어보였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돌아가시기 1년 전까지도 여러 강의에서 뵈었던 담당교수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담당교수님이라 하더라도 단 1년의 인연이었는데, 왜인지 나는 그 분의 운구까지 도와드렸고 장지까지 따라갔다. 그 후 집에 돌아가면서 문득 고모가 떠올랐다. 명절이나 기념일에 만나 뵈면 '많이 컸네', '씩씩해졌네' 먼저 말씀하시곤 웃으며 반겨주시던, 고모의 마지막 가는 날 그 자리에 없었다는 사실이 시간이 꽤 지나고 나서야 무거운 짐처럼 남았다.
윤단비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 ‘남매의 여름밤’에 대한 글을 쓰기에 앞서 다소 장황하고 개인적인 첫 경험으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아마 누구라도 이 영화를 본 후 각자의 어떤 기억들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이 바로 이 기억이었던 것처럼 ‘남매의 여름밤’은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기억을 다시금 떠오르게 만들어주고, 그 기억을 또다른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힘을 가진 영화다.

풍경, 빛, 소리, ... 실로 영화적인 것들을 통해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신비한 경험
01 — 감각하게 만드는 카메라
‘남매의 여름밤’은 원래 살던 반지하 방을 떠나 할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된 옥주 가족의 어느 여름날 속 일상적 시간들을 다룬 간단한 플롯으로, 대부분의 러닝타임은 특별한 사건 없이 그들의 관계성이 얽히는 평범한 일상으로 채워진다. 그래서 ‘남매의 여름밤’은 서사의 밀도보단 기억과 기억 안에서 느꼈을 감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영화 초반부, 할아버지의 오래된 이층 양옥집에 들어오자마자 남매와 관객들은 과거로 회귀한 듯한 감각을 체험할 수 있다. 옛날 노래의 가락이 맞아주는 거실은 옛날 달력과 달마도, 전축, 도자기 등 옛날 집 특유의 인테리어로 꾸며져 시간이 고스란히 보존되어있는 듯한 생활감이 있다. 그를 통해 배우와 관객을 영화가 원하는 깊이에 재빨리 들여놓으며 다양한 감각과 확실히 가깝게 만들어주는 로케이션이 탁월했다.
그런 기반을 바탕으로 영화는 시각예술을 뛰어넘어 관객이 느끼기 힘든 감각마저 놓치지 않는다. 콩국수나 비빔국수 같은 음식들에선 계절감이 물씬 느껴지고, 그 외에도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하는 장면들로 영화의 시공간에 적합한 미각을 느끼게 한다. 여름의 매미 소리, 개 짖는 소리 등 어린 시절 골목 풍경을 떠올리는 소리나 동네 곳곳의 생활소음으로 전하는 청각도 마찬가지다.
특히 많은 영화가 배경음악으로 관객의 감정을 유도하는 편인데, ‘남매의 여름밤’은 영화에 중점적으로 쓰이는 음악 1개 외에는 의도적인 음악 삽입 없이 자연스러운 엠비언스를 통해 관객 스스로가 공간을 입체적으로 감각하게 만든다.
의도적으로 시간의 밀도를 낮추고 공백을 둔 쇼트 배열은 다소 흐릿한 노스탤지어로 영화가 풍기는 과거를 향한 감각을 보편화하는 동시에 각자의 사적인 기억이 틈입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그래서 무한히 읽힐 수 있는 영화이면서도, 발산에만 그치지 않고 각자의 경험을 하나로 묶어낸다.

서로 서운해하고 짜증내고 미워하다가도 할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해주기 위해 한자리에 모이는 가족. 영화의 쇼트는 때론 인과로 이어져 붙어있지만, 이처럼 많은 것이 생략된 채로 달리 정리되지 않고 넘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뚝 끊어진 느낌을 주기보단 '그냥 그렇게 붙어있는 것이다'는 느낌이다. 가족이 그렇다.
02 — 이별을 대하는 어른과 아이
‘남매의 여름밤’이란 영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한순간도 빠짐없이 이별하고 있는 영화라 할 수 있겠다. 영화의 제목이 ‘남매의 여름밤’인 것도 삶의 시간차를 갖고 있는 두 남매(아빠-고모, 옥주-동주)가 그들을 가족으로 연결하는 할아버지의 양옥집에 모인 여름날 겪게 되는 이별이 모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여름밤의 여름이란 계절과 밤이라는 시간대는 그런 이별 속에서 느끼게 될 아련한 감정들이 극대화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결국 그 경험이 각 인물들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인물들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걸 인물들이 저마다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대해 보여주는 영화인 셈이다.
영화의 영어 제목 ‘Moving On’, 원래 감독이 생각했던 제목인 ‘이사’처럼 영화는 옥주 가족이 살던 장소인 반지하를 떠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옥주가 살던 반지하는 재개발을 앞둔 주택가다. 다시 그 자리에 가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한때 자신들의 보금자리였으며, 수많은 추억을 함께 했을 장소를 떠나온 가족은 영화 말미에 이르러선 할아버지를 떠나보낸다.
그들이 이미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가족임을 생각하면, 그들은 삶에서 주요하게 이어져온 사람들과도 계속해서 이별해오고 있다. 게다가 영화는 시간과 시간 사이의 간격 혹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 내내 이별의 감각을 표현하고 있다. 툭하면 투닥거리며 다투는 옥주와 동주의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의지하고 조금은 갈등하는 아빠와 고모 남매의 지금 모습처럼 될지도 모른다. 불현듯 떠오른 어린 날의 기억으로 동주에게 장난을 치는 아빠의 자리에, 언젠가는 동주가 있게 될 것이다. 어린 날과의 이별이다.
영원할 것처럼 행복하고 웃음 가득했던 가족의 시간 또한 결국 과거가 되고, 추억으로 남는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계속해서 이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별을 대할 때 어른들은 냉정하다. 이미 이별의 경험을 많이 겪어온 만큼, 할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을 존중하기보단 자신들이 우선이다. 이미 자신들끼리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려고 결정했다. 반대로 옥주는 할아버지와 가깝지 않지만, 할아버지의 시간을 존중할 줄 안다. 돈을 드려도 쓰실 곳이 있겠냐는 어른 남매와 달리 옥주는 할아버지에게 모자를 선물한다. 할아버지 의사를 묻지 않고 요양원에 보내려고 하거나, 집을 팔려고 하는 아빠와 갈등을 빚는다.
옥주는 할아버지의 남은 시간을 계산하며 끝을 생각하기보단, 아직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계속될 미래를 그리고 있다. 한밤중 할아버지가 홀로 '미련'을 듣고 있을 때 옥주가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계단에 앉아 함께 노래를 듣는 장면도 옥주가 할아버지를 향해 표하는 깊은 존중의 태도이다.
그러나 옥주의 시간도 그 자리에 멈춰있지 않을 것이다. 아빠와 고모처럼 가차없이 과거와 이별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옥주. 동생 동주처럼 천진하진 못해도 이별이 두렵고 영영 함께 할 수 있다는 허황된 바람을 놓지 않은 옥주도 언젠간 결국 이별에 둔감한 척 살아가는 어른으로 커버릴지 모른다.

누구나 아무에게도 밝힐 수 없는, 설령 고백하더라도 스스로 짊어져야 할 자기만의 상처와 고독의 무게가 있다. 혼자 남아서 감내해야 할 이별들이 있다. 옥주는 그걸 알기에 동주보다 괴롭고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누나지만, 아직 어른들처럼 덜 아파할 방법까진 몰라 온전히 상처받으며 자라고 있는 아이다.
03 — 그 자리에 남아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
영화가 시작하고 옥주 가족이 살던 반지하 방을 비춰줄 때, 옥주가 자리를 떠나고 나면 화면에 남는 것은 불 꺼진 방의 고요함 뿐임에도 카메라는 이 곳에 잠시간 머무른다. 일반적으로 프레임에서 인물처럼 살아있는, 동적인 요소가 자리를 벗어나면 의미를 잃어버린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오프닝의 반지하처럼 화면에 빈 공간만이 존재하는 시간들이 적지 않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장면(옥주 남매가 할아버지의 집에 처음 들어오는 씬)으로 시작하는가 하면, 반대로 인물이 존재했다가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몇 초간 공간을 비춘다. 이는 사람이 아닌 공간을 통해 남겨진다는 정서를 관객에게 감각하게 만들기 위한 연출이다.
이 빈 공간이 주는 감정은 영화의 엔딩,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가족들이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찌개가 짜서 물을 부었더니 좀 싱거워졌다는 아빠의 말도 인상적이지만, 가만히 밥을 먹고 있는 옥주의 표정을 잡은 그 다음 쇼트를 보라. 옥주는 밥을 먹다 불현듯 울음이 터진다. 정확히는, 옥주의 정면을 잡고 있는 쇼트에선 보이지 않는 맞은편을 본 옥주가 감정을 참지 못하는 듯 보인다.
한참을 서럽게 울던 옥주가 방에 올라가려 할 때에서야, 카메라는 옥주의 맞은편을 비춘다. 영화를 통해 거실의 구조를 유심히 지켜보던 관객들이라면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맞은편엔 소파가 있다. 남매와의 첫 만남에서도, 할아버지의 생신 파티에서도, 한밤중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때에도, 영화는 인물과 관객들에게 그 곳이 할아버지의 자리임을 영화 내내 각인시켜왔다.
하지만 이제 그 자리에 할아버지의 모습은 없다. 텅 빈 소파만 놓여있을 뿐이다. 항상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의 부재와 그 슬픔은 빈 공간을 통해서야 비로소 절절히 깨닫게 된다. 그걸 마주하기 두려웠던 옥주 남매는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있었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영원히 외면할 수 없다. 여전히 할아버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집 구석구석을 비추는 카메라, 하지만 얼마 전까지 그 자리에 있던 할아버지는 더 이상 곁에 계시지 않는다.
옥주는 왜 그 순간 그렇게 서럽게 눈물을 쏟은 것일까. 돌아가신 할아버지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의 인물들, 특히 옥주는 내내 이별을 겪고 있다. 오프닝에서 살았던 집과 이별했고, 마음에 들던 남자아이와의 관계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다. 팔려던 신발 거래는 잘 안된데다 그 과정에서 아빠가 팔던 신발이 짝퉁이란 사실까지 알고 나니 썸남에게 창피한 마음이 들어 관계를 끊으려 한다.
와중에 할아버지의 의사도 묻지 않고 행동하는 아빠와 고모의 모습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엄마를 만나지만, 그것은 사실 엄마를 만난 꿈에 불과했다. 이전 고모와의 대화에서, 그리워서 꿈을 꾼다는 고모와 꿈을 꾸지 않는다는 옥주의 대사를 생각하면 장례식장에서 옥주가 꾸는 꿈은 옥주가 얼마나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결국 옥주는 엄마와 만나지 못한다. 속절없이 이별하는 순간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들, 독립적인 보금자리의 안식이 필요했던 옥주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그 자리를 찾지 못한다. 그런 야속한 감정이 쌓이고 쌓인 상태에서, 그나마 심정적으로 공감하던 할아버지의 죽음까지 받아들여야 할 상황에 놓이니 울분이 터졌던 것은 아닐까.

고모까지 넷이서 할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하고, 할아버지가 떠나고, 엄마도 만나지 못한 옥주의 어느 여름 또한 언젠가 또 하나의 꿈으로 되돌아올 추억이 되겠지. 옥주에게 이 여름은 어떻게 남을까.
04 — 매일 이별하고 있다는 사실
영화의 오프닝을 기억하는가. 반지하 방을 나와 할아버지 집으로 향하는 가족의 다마스가 살던 동네의 풍경을 뒤로 하며 앞으로 가는 것을 정면에서 잡아주는 트래킹 쇼트.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며 거리감각을 느끼게 하는 카메라는 마치 닿을 듯 닿지 않고 멀어지다 가까워지곤 하는, 과거의 어느 때와 현재의 나 사이의 줄다리기로도 느껴진다. 어떤 때에는 선명하게 느끼다가도, 언젠가는 속절없이 놓쳐버리고 말았던 감정들. 끝내 맞닿을 수 없이 화면을 재빨리 벗어나고 마는 과거의 순간들. 김광석의 유명한 노래 '서른 즈음에'의 가사처럼, 우리는 매순간 이별하며 살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남매의 여름밤’은 ‘동경 이야기’, ‘맥추’, ‘꽁치의 맛’ 등 숱한 걸작을 남긴 일본의 거장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들을 떠오르게 만든다. 어린 시절 광주극장에서 오즈의 영화를 접했던 감독에게 그의 정서는 필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가 익히 아는) 오즈의 영화에선 이미 시간의 반복과 세월의 무게를 경험한 중/노년의 주인공이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위치에 있는 반면 윤단비의 영화에선 아직 그런 시간들과의 이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어리숙하고 예민한 소녀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쪽에 가깝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마 오즈 영화의 어른들도 언젠간 옥주처럼 이별을 맞닥뜨린 순간의 생경함에 어쩔 줄 몰라하며 자라오지 않았을까. 많이 알려진 오즈의 후기작이 아닌 초기작들에선 지나치게 솔직하고 정을 주던 나머지 상처받고 시련을 겪는 청년들의 영화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반복될 시간 속에서 윤단비의 영화가 관조하고 있는 삶과 인물들이 오즈의 영화처럼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해갈지가 더욱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는 이유 중 하나는 현실이 놓치고 있는 것을 영화를 통해 깨닫고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영화라는 매체의 힘이고, ‘남매의 여름밤’은 많은 관객들 저마다의 과거를 되새기게 만드는 영화다. 생각보다 이별에 둔감하게 사는 우리를 위해 영화는 삶이 얼마나 많은 이별들과 함께 흐르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별의 아픔과 소중함을 아는 사람만이, 새로운 만남과 이어지고 있는 삶의 가치를 절실히 느낄 수 있기에 영화는 결코 슬픔이나 그리움 같은 감정에서 멈추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가 없었다면 그저 흘러가고 말았을 시간들의 소중함, ‘남매의 여름밤’은 그런 기억을 다시 소환하여 감각할 수 있게 만들어주고, 더없이 소중했던 순간들을 제대로 추억하게 만드는 영화다.
EDITOR'S NOTE
혹시 윤단비라는 이름을 처음 보는 분들도, 이미 알던 분들도 더 선명하게 기억해주길 바란다. 빛바랜 일기장 속 삶의 흐릿한 페이지들을 반듯하게 찢어 다시 오래도록 반짝거리게 그려내는 시네아스트. 나는 그렇게 불러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제 막 2번째 장편을 공개하는 젊은 감독이지만, 더 많이 주목해도 좋을 감독이라고 본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봉박홍이'가 될 거장의 위대한 걸음을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다.